'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267 Page) 미니멀라이프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500년 상식을 뒤집는 용기

500년 상식을 뒤집는 용기

카테고리 없음

 

도치倒置하라

2008년 1월 4일 첫 회가 방송된 KBS의 주말 대하드라마 제목은 놀랍게도 [대왕세종]이었다. 이 제목이 놀라웠던 이유는 500년 동안 털끝만큼도 변함이 없던, 바위처럼 단단해서 한 덩어리처럼 생각되던 ‘세종대왕’이 사실은 ‘세종’과 ‘대왕’으로 나뉠 수 있음을, 심지어 서로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상태에서 순서만 바꾼 제목이 어찌 그리 새롭고, 매력적이고, 힘이 있고, 묘한 설렘을 던져주던지! 그건 세종의 재발견이요, 사극의 재발견이요, 도치법이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수사법의 재발견이었다. 적절하게 쓰기만 한다면 도치법 하나 만으로도 얼마나 크리에이티브한 제목이 지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델이었다. 제목이 신선하다보니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극과는 다른 스타일의 사극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이끌어냈고, 첫방송에서 20.1%(TNS 미디어코리아)라는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대조영이라는 선행 드라마의 인기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제목이 가진 매력 또한 무시 못 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도치법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우는 수사법이다. 21개의 국어 표현법 가운데 문장의 구조를 물리적으로 뒤바꾸는 것이어서 눈에 보이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그래서 이해하기도 참 쉬운 수사법이다. 대유, 역설, 은유법 등은 도치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진다. 도치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인데, 안정된 문장구조를 흔듦으로써 주의력(다른 문장과의 차별화)을 높이는 것이 하나, 강조하고 싶은 말을 앞에 놓음으로써 지름길을 취하는 것(최우선 가치의 선택)이 다른 하나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이 [제작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왕세종은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드라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이라는 한 개인을 앞세우는 기존의 단어보다, 리더십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왕’이라는 단어를 맨 앞으로 보내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유효했을 것이다.

국어 표현법에서 쉬운 듯 보이는 도치법은 그러나 막상 쓰려고 보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문장의 도치 이전에 생각의 도치가 필요하고, ‘역전의 발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왕세종]만 하더라도 뒤의 두 자를 맨 앞으로 보내는 것은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몇 센티의 작은 변화가 아니라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큰 변화였다. [대왕세종]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도치란 앞과 뒤가 바뀌는 게 아니라 500년의 세월동안 닳고 닳았던 생각을 새롭게 하는 대단한 용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앞이라 생각했던 ‘세종’이 ‘대왕’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 혁신을 보며, 필자는 그것이 어쩌면 반상의 계급구조를 뒤집는 것만큼 어려운 혁명적 변화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 놀라운 새로움이 드라마 제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건, 크리에이터로서 남모를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도치법을 그대로 표현한 성서 구절은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일 것이다. 국어 문법의 차원으로 보면 도치법이요, 계급사회로 보면 혁명의 발상이요, 신앙으로 보면 신의 셈법이 인간의 그것과 반대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러니 도치가 쉽다고 누가 감히 말할 것인가?

사랑한다고 먼저 말하라. 어떻게, 왜, 얼마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사내 게시판에 올리는 흔한 공지사항에도, 동료들이 먼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앞세워라. 입사지원서에서도 당신의 꿈을 깃발처럼 맨 앞에 세워라! 그런 도전정신과 창의정신이 당신을 돋보이게 하고, 당신의 인생 또한 바꿀 것이다.


(2008 월간 샘터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