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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더브라를 주문하며

원더브라를 주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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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산들 말일세”

“예, 아버님...”
“꼭 처녀 젖가슴 같지 않은가?”
“예?”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학생신분에 형이 해외근무를 하느라 넘기고 간 차는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았다. 홍천강 계곡으로 주말여행을 가 계신 여자 친구의 가족을 만나게 된 건 차가 있었기 때문이라면 때문이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딸을 데리고 온 청년에게, 처음 인사를 한 딸의 남자친구인 내게 아버님은 풍경을 감상하시다 말고 저 말씀을 꺼냈다. 하지만 여름이라 날은 덥지, 원두막에 포진하고 계신 일가친척들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지, 근처 음식점에서 시켜다 놓은 닭볶음탕은 맵고 뜨겁지...... 이빨을 쑤시시다가 갑작스럽게 던지신 저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처녀들 젖가슴 말이네”
“아, 예~”

처녀 젖가슴과 처녀 아닌 젖가슴의 차이도 딱히 몰랐지만, 어른들 말씀에 그저 ‘예’라고 추임새만 넣어드려도 말씀은 또 탄력을 받아 이어지는 법. 책 읽기를 좋아하시고 나름 문학소년의 기질이 있는 분이라 ‘젖가슴 같은’ 산봉우리 얘기는 흘러 흘러 다른 문학작품 얘기로 이어졌던 것 같다. 다만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들은 낮은 구릉이 아니었던 바, 높고 커다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상상할 수 있는 가슴은 빈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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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가슴이 클수록 좋은지는 모르겠다. 너무 큰 가슴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어깨가 아프고 뒷골까지 당긴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몇몇 여인들에게 탐문한 바로는, 빈약한 가슴은 옷태가 나질 않고 콤플렉스를 느끼게 한다, 여자들은 풍성한 가슴을 선호한다, 가능하면 가슴이 컸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여성용 속옷 브랜드들이 다들 볼륨감 있는 몸매를 만들어준다고 자랑하고는 있지만, 그 중에서도 원더브라Wonderbra는 무조건 큰 가슴을 강조하는 광고 캠페인으로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옷맵시를 살리거나 섹시해보이거나 자신감을 드높여준다는 뜻이겠지만 광고 표현에 있어서는 이도저도 아니고 오로지 ‘큰’ 것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빌딩이나 혹은 아파트라 생각되는 주차장.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와 차 문을 연다. 여자는 허리 아래만 보이는 앵글이어서 얼굴도, 나이도 알아볼 수 없다.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고 시동을 거는 순간, 빵~ 하는 크랙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잠금장치를 제대로 풀지 않아서 나오는 경보음인가? 아니면 뭔가 신경질을 부리고 싶어서 여자가 크랙션을 세차게 누르는 상황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크랙션 소리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윽고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 멀리 사라지는데 화면 한 쪽에 Wonderbra라는 로고가 뜬다. CF가 끝날 때까지(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크랙션 소리는 계속되는데 왜 크랙션이 울리고 있는지는 원더브라 로고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크랙션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고장도 신경질도 아닌 여자의 가슴이 원인! 정말 원더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wonderbra now in India (원더브라. 마침내 인도 상륙!)

어깨가 아파도 나는 큰 가슴이 좋아요. 크랙션이 시끄럽게 울리더라도 나는 큰 가슴을 가진 여자예요. 나는 이런 여자. 가슴 커서 행복한 여자예요......

원더브라 광고만 보면 여자들이 가진 가장 큰 꿈은 큰 가슴인 것만 같다. 가슴이 커서 삶이 좀 불편해질지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긴 성형의 메카인 압구정에도 얼마나 많은 가슴확대수술 문구들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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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케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문득 멈춘 것은 노란 색 바탕에 까만 글씨로 자신의 가치를 뽐내고 있는 원더브라 로고 때문이었다. 브래지어와 팬티 6세트에 추가 팬티 3장을 서비스로 얹어 드리면서 10만 원대라고 쇼 호스트들은 가슴을 내밀며 열띤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 용품에 딱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일은 여자 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애 초기 단계가 아니면 별반 없다. 왓 위민 원트 What women want 라는 영화에서 광고 제작자인 멜 깁슨이 스타킹을 신어보고 여성용 제모 용품을 직접 써보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여자용품을 광고하는 경우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홈쇼핑으로 뭔가를 사 본 역사가 없었던 나는 그 로고에 갑자기 들떠버렸다. 와이프에게 제대로 된 속옷 한 벌 선물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집에만 있다고 늘 싸고 편한 것들만 사 입는 아내도 뭔가 그럴듯한 속옷 한 번은 입혀줘야 하지 않을까? 가슴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내가 아는 한) 여자들의 로망인 원더브라 한 번쯤 와이프 가슴에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 시간에 쫓기며 주문방법을 찾아보고 깜빡 잠들어 있던 와이프를 깨워 사이즈를 묻고, 필요 없다는 소리를 모른척하면서 주문을 넣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파는 여자 스타킹의 늘씬한 다리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청소년기를 거친 후로 여자용품에 그렇게 눈이 간 것은 처음이었다.

박스 겉면에도 자랑스럽게 Wonderbra를 큼지막하게 써 놓은 택배를 받았을 때, 와이프는 유명한 브랜드답게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기능만을 강조해서 소박하게 포장을 하지도 않은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결과적으로 본인이나 남편이나 사이즈를 잘 가늠하지 못해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원더브라를 선물했다는 뿌듯함을 꺾지는 못했다.

아내에게 원더브라를 선물한 나는 때깔 고운 한 세트의 속옷을 지켜볼 때마다 흐뭇했다.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드는 생각. 칠순이 넘으신 우리 엄마나 그보다 몇 년 젊으신 장모님께도 한 세트 선물해드리면 어떨까 하는 것. 그 분들의 가슴이 크랙션을 누를 정도가 돼서가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말고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실 여성스러움을 응원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이효리가 아니더라도, 홍천강가의 봉우리 같지는 않아도, 그분들의 가슴 또한 여자의 꿈이 아직 남아있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 <15초, 생각뒤집기 / 샘터> 뒷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