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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줌마들의 건망증

아줌마들의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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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 9시부턴가 정전이 된다고 방송이 나왔거든. 그날은 아침부터 무지 서둘렀지. 사실 전기 쓰는 일 중에 급한 일은 별로 없잖아. 근데 그냥 서두르게 되더라고. 밥도 일찍 하고, 설거지도 바로 해버렸지. 근데 왜 집안일이 그렇잖아? 한 번 탄력 받으면 몇 달씩 미뤄두던 화장실 청소 같은 것도 당장 안 하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급해지고... 부지런 떠는 김에 집안 청소까지 시작한 거지.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서 드디어 청소기를 콘센트에 꼽고 켰는데 어? 작동이 안 되는 거야. 이런 낭패가 있나? 다 벌려 놓았는데 하필 이런 때 청소기가 고장이라니... 급해진 마음에 바로 AS센터로 청소기를 들고 갔어. 무지 더운날이었는데 끙끙대며 먼길을 갔지. 도대체 뭐가 고장이에요? 이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AS센터 직원이 작동을 시켜보고는 "어? 잘 되는데요?" 그러는 거라. 딱 그 순간에 생각났어. "오늘 00시부터 00시까지 정전이오니 입주자 여러분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방송이. 청소기를 들고 오면서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2.

 

 "놀토 갈토 있었던 땐데... 애들은 학교에 가고 애 아빠는 쉬는 토요일이었다? 애 아빠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자니 아침이 늦잖아. 근데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데 밥이 영 안멕히는 거야. 이상하다... 왜 이렇게 입맛이 없지? 나이 들어 그런가? 아님 속에 병이라도 생긴 건가? 속으로 별생각을 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구. 그래도 아침밥은 먹어야겠다 싶었던 거지. 빈그릇을 챙겨서 설거지를 하려고 개수대에 딱 갔는데, 띵~ 하더라구. 아차! 나 애들 밥차려주면서 아침 먹었던 거잖아? 헐~~~ 아침을 두끼째 먹으려니 당연히 안 멕히지... ㅜㅜ 그런 적도 있다니까?"    

 

 

놀이터 팔각정에서, 두 번이나 연거푸 물 없이 쌀만 넣고 밥을 안쳐 압력밥솥을 까맣게 태웠노라고, 밥솥 뿐만 아니라 속이 타들어가 죽겠라고 하소연하는 아내에게 동네 아줌마들은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대략 위와 같은 얘기들을 들려주면서. "애 낳고 우리 나이쯤 되면 그런 일 한 두번씩은 다 있어~" 그러면서.

 

 

그런 그녀들의 속상함, 혹은 체념을 전해 들으면서 이 광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도에 온에어됐던 박카스 광고다. 

 

 

 

우연히 냉장고에서 아내의 핸드폰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묻는다.    

- 아하... 당신 핸드폰 어디다 뒀어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양말을 개고 있던 아내는 TV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다.  

- 그 식탁위에 있을 거에요... 왜요?

 

아내의 핸드폰을 슬며시 식탁 위에 올려 놓으며 할아버지는 모른척 한다.    

- 아니 그냥... 야구 좀 보자

 

아내는 즐거운 듯 톤이 높은 목소리로 면박을 준다. 

- 아이고 지금 얼마나 재미있는거 하는데요. 양말이나 좀 뒤집어 놓지 마세요. 

 

식탁 위에 핸드폰을 올려 놓는 할아버지의 손 근처에서 자막은 이렇게 뜬다. 

오랜 세월 내곁을 지켜준 

아내는 나의 피로회복제입니다

 

그리고 나레이션.

박카스

 

 

 

 

 

이제 익숙해지기까지 한 아내의 건망증 혹은 치매의 전조..

이제는 그렇게 제 기능을 못하는 당신이지만 당신은 내 삶의 힘이었고, 힘이라오...

광고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서로, 서로의 치매를 견딜 수 있을 때 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