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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의 공덕 - 월화수박금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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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라는 과일 이름을 먼저 익힌 둘째가
월요일에서 시작해 일요일에서 끝나는 '요일' 개념을 익히고 있는지 
식탁에서 뭔가를 먹고 있다가 느닷없이 

"엄마, 월화수박금토일이야?" 그런다.
4년 전쯤이니까 아이들이 3살 때였을 것이다.


 
"하하하... ;;;"
"크크크... ^^"
 
둘째의 인토네이션은 음... 요즘으로 치면
개콘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장군이 "그래~~? 그렇취~?" 할 때처럼
뒷끝이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는 스타일인데..
아무튼 갈라질듯 말듯한 목소리로 끝을 올리며
월화수박금토일이냐고 기상천외한 물음을 물었더랬다. 

아직 언어도 사고도 틀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은 어린 머리가 
이미 배운 몇 개의 단어를 바탕으로 추론한 결과랄까... 뭐 그런 것일텐데 
거기엔 또 수박이라는 이름의, 달디 단 옹달샘 같은 과일에 푹 빠져 있던 
그 즈음 쌍둥이들의 간식생활이 엿보이기도 한다. 


살펴보면,

과일만큼 여기저기에서 두루 호의적으로 쓰이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사교성 많은 팔방미인처럼
본래 자신의 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 가서도 맹활약하는 것이다. 


과일업체인 Dole Korea가 대회의실, 중회의실, 소회의실 이름을
스위티오룸, 바나나룸, 파인애플룸, 망고라운지 등으로 정한 것은 뭐 그럴 법도 하다.
이 정도의 창의성도 발휘하지 못하는 회사가 대부분이지만,
과일회사가 자기들이 취급하는 과일 이름을 회의실이라는 딱딱한 이름 대신 붙여 놓은 것을
대단한 발상이라 박수 쳐주기엔 남세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이다. 
'노력하는 기업' 정도의 이미지는 되겠다.  
과일이 재미있는 것은 Dole처럼 연관성 있는 곳 뿐만 아니라 
의외의 곳에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렌지 정기예금>이 있다면 이건 또 무슨 특이한 생각이 발동을 한 걸까?
우리은행은 과일은행도 아니면서 오렌지 정기예금을 팔았다.
그런가하면 광고를 아주 독특하게 잘 하는 유럽 통신회사의 이름이 <오렌지 커뮤니케이션>이다.
열대의 과일, 식용 과일의 대명사인 오렌지는 이렇게 식탁을 떠나
커뮤니케이션의 대표 미인으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사는 오렌지가 있는데 바로 <오렌지 카운티>다.


오렌지만 활약하는 것이 아니다.
<토마토>는 드라마 제목(SBS, 1999)이기도 했고
'토익점수 마구 올려주는 토익'의 줄임말로 이 분야의 꽤나 유명한 교재이기도 하다.
<토마토 저축은행>도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500개의 점포를 가진 의류업체 이름은 <바나나 리퍼블릭>, 즉 바나나 공화국이다.
망고 또한 의류브랜드.
온전한 과일도 모자라서 한 입 베어문 사과도 기업이 이름이 되었으니
IT매니아들의 입에 늘 침이 고이게 만드는 <Apple>사도 있다.


멜론이라는 음악 서비스 사이트도 있다.
영문으로 Melon인데 원래 이름을 지을 때는 Melody on을 줄여서 멜론이라고 했고,
실제 광고에서도 멜론에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듣는 것으로 표현됐다.
과일 이름이니 외우기 쉽고, 왠지 상큼한 느낌도 들어서 쉽고 재미있는 광고가 가능했던 것이다.
'멜로디 온'이라는 기능적인 설명은
멜론에 호감을 느끼고 사이트를 방문했을 때나
검색 사이트에 멜론이 뭔가요? 라고 검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므로

애써 그 이름의 기원을 CF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설명조의 CF는 뭐랄까... 하수의 작업방식이라고나 할까?  



『키친』(1988)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본명은 요시모토 마호코(吉本 眞秀子)다.
지난 2008년 방한 당시 인터뷰에서 '바나나란 필명을 쓰는 이유'를 묻자
'바나나보트를 좋아한다. 이름만으로는 성별을 알 수 없기 때문이고,
바나나는 또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아는 과일이어서다'라고 답변했다.
어떤 미디어에서는 그녀가 바나나라는 필명을 정한 이유를 '그냥'이라고 답했다고도 전한다.
바나나라는 이름의 작가.
홍보 전문가 수십 명이 달라붙어 해야 할 일을

과일이름 하나로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과일에 대한 전방위적인 호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향기에서 오는 걸까? 컬러에서 오는 걸까?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색깔, 맛, 향, 감촉, 씹을 때의 소리까지 오감이 풍부한 것이 바로 과일이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영양공급원으로서의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스타일 중심의 이 시대에도 통하는 '스타일을 가진' 먹거리인 것이다.
먹는 것도 즐거운데 그게 스타일까지 있다니!
그래서 과일은 우리 사는 여러 분야에서 Title의 자리를 차지했다.

아니, 더 원초적으로,
자신의 씨앗을 퍼뜨리려고

자신을 먹어 줄, 곧 '소비'해줄 동물들을 유혹해야 했으니
'생명을 걸고 유혹해야만 했던 절박함'
스스로를 누가 봐도 매력적인 창조물로 진화하게끔 했을 것이다.

**

그건 그렇고... 
제 품에 섹시하도록 달달한 옹달샘 하나씩 품고 있는 여.름.과.일. 수박이,
이 순간 문득 먹고 싶어졌다.
흐흡~